굴드 vs.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리처드 도킨스와 동갑이고, 죽기 전까지도 리처드 도킨스(생존)와 시종 으르렁대던 사이였다. 열정적인 진화론학자로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굴드는 ‘점진설’과 ‘단속평형설’ 사이에 벌어진 세기의 논쟁에서 ‘단속평형설’ 패거리의 보스 노릇을 하던 대과학자였다. 도킨스와 굴드는 각자 고생물학(굴드)과 동물행동학(도킨스)로부터 출발하여 ‘진화생물학’ 영역에서 만난 거장이었으며, 인문학적인 소양으로 보나 글빨로 보나 대중적인 인기로 보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눈먼시계공], [만들어진 신]을 읽었고, 굴드의 책은 [풀하우스],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를 읽었고, 원제목이 [Dawkins vs. Gould]인 킴 스티넬리의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로 마무리를 했다.

나는 도킨스의 글솜씨를 좋아하고, 도킨스의 명확한 개념 정리와 문제 해결 방식을 좋아한다. 또한 굴드의 철학을 좋아하고, 굴드의 열정을 좋아한다.

점진설 vs. 단속평형설

점진설은 진화가 생명 역사의 시간축 전 영역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졌다는 학설이고, 단속평형설은 진화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고 종분화 이후로는 좀처럼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설이다. 점진설과 단속평형설은 진화의 속도와 타이밍의 문제를 두고 양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킨스와 굴드가 겨냥하는 지점은 약간 다르다. 도킨스는 ‘도저히 믿을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생명체’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진화론을 바라보고, 굴드는 ‘캄브리아대의 고생물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진화가 필연적인 과정인가’라는 주제에 다다르는 관점으로 진화론을 본다. 도킨스가 동물행동학, 굴드가 고생물학자인 걸 생각하면 당연한 화두이다.

그런데 단속평형설이 신다윈주의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등장하면서 경쟁 구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마치 다윈주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진화론이 자체 붕괴되는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킨스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 나름대로는 진화가 ‘진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던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연구에 일생을 바쳐왔다. 즉 원시생물로부터 인간의 진화가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이 정해진 길을 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야말로 ‘우연히’출현하게 된 크리스마스트리의 한구석에 매달린 장식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에 인간의 패러다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학설이었다. 인류의 가까운 조상은 침팬지같은 동물이고, 먼 조상은 어류의 한 종이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다윈주의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원시생명의 출현 이후 어류의 육상, 공룡의 멸종, 포유류의 진화가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진 종이 출현하기 위한 중간 단계이고,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거나 무언가의 손길에 의해 옆길로 새지 않게 잘 인도되었다는 것이다.

굴드는 당시의 어떤 위대한 고생물학자도 벗어나지 못했던 그 확고한 패러다임이 증거에 의해 붕괴된다는 설명을 내 놓았다.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라 부르는 현상의 화석 증거로 그러한 학설을 제시하였고, 현재는 이 학설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다.

굴드의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는
- 마치 남극고지를 점령한 탐험대가 남긴 일지를 훔쳐보듯,
- 사건 해결을 위해 온갖 과학기법을 도입하는 탐정의 수사기록을 살피듯,
- ‘인간은 필연적인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는 의구심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캄브리아기 버제스혈암 화석의 신비가 밝혀내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생명 테이프를 되감아 캄브리아기 시대부터 다시 돌렸을 때 인간이 다시 출현할 가능성은 없다.”

굴드가 남긴 일생일대의 메세지는 이 한 권의 책에 압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