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있고 과학은 없다

서울공대를 다니면서도 과학은 전혀 몰랐다. 정말 그랬다. 1학년 1학기 공대 공통과목인 일반물리 중간고사에서 세 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도 과학은 몰랐다.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도 진화론도 어떠한 종류의 우주론도 배우지 못했다.

현대는 기술의 시대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일론 머스크는 기술 혁신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다. 한때 신경과학자의 길을 걸었다는 데미스 하사비스를 시대의 아이콘 목록에 추가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에트리(ETRI)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과학 수다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다. 치열했던 과학 수다는 아마도 150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던 시절의 기억이 거의 마지막이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행성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작년에 에트리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라는 모임에서 에릭 캔델의 책을 주제로 ‘통찰의 시대: 과학과 예술의 새로운 협력’이라는 강연을 했다. 참석자들과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3시간 동안 나눈 얘기는 이를테면, 700메가 주파수 대역을 재난용으로 쓸 것이냐 IOT로 쓸 것이냐, 와이브로의 기술적 성공과 시장에서의 실패, 5G와 와이브로의 기술적 유사성, 대한민국 간판을 모두 LED를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인공지능 기술의 부침, IBM 왓슨 개발의 역사와 같은 것들이었으니 과연 내가 다니는 연구소가 에트리가 맞구나 싶었던 순간이다. 기술은 있고 과학은 없었다.

기술의 시대에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10년 전쯤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에트리 건물 1층에서 백북스(당시 이름은 100권독서클럽) 모임이 2주에 한 번씩 열리고 있었지만 화요일 저녁에 나는 항상 축구를 하러 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백북스 선정도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생명 최초의 30억년>이라. 급변하는 세상을 쫓아가기 바빠서 3년 단위로 IT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에서 그토록 한가한 주제라니. 나는 당시만 해도 30억 년이라는 시간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30억 년 전의 지구에도 생명이 있었구나. 그렇게 나는 백북스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문화 충격을 제대로 받았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 발제를 준비한 백북스 회원은 저자나 역자도 아니며 교수나 박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석 달 이상을 오로지 그 날의 발표를 위해 산 것처럼 보였다. 열 권도 넘는 책이 참고도서로 언급되었다. 아! 과학을 이토록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백북스(100books.kr)는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대전에서 조촐하게 시작됐다. 2주에 한 번, 거르지 않고 14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으며 서울, 인천, 충북, 강화에서도 모임이 열린다. 대전백북스는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책을 선정하려고 노력한 탓에 과학책도 꽤 읽었다.

그리고 2008년이었던가, 서울백북스가 조그만 사랑방에서 출발했다. 대전에서 시작된 독서모임 플랫폼을 서울로 옮겨 심는 작업에 나도 힘을 보탰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서울백북스는 과학책을 읽기로 작정했고, 지금의 서울백북스는 전국에서 둘도 없는 과학독서 모임이 되었다.

백북스 외에도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APCTP 크로스로드 웹진과 소백산천문대 행사,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시리즈 강연, ‘과학과 사람들’에서 기획한 팟캐스트와 공연들, 과학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들,페이스북 그룹 ’과학책 읽는 보통 사람들’에서의 과학책 이야기들이 과학 문화의 토양이 되고 있다. 이제 edge.org나 과학 전문 도서관 설립으로 넘어갈 때가 된 듯하다.

과학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길래

과학은 지식을 만드는 활동이며 자연을 기술한다. 과학은 물론 기술 개발의 토대를 제공한다. 양자역학을 모르고 트랜지스터는 있을 수 없으며, 상대성이론을 모르고 정교한 GPS는 불가능하다. 과학은 기술의 씨앗과도 같다.

하지만 과학이 기술 개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은 과학 없이도 만들어진다. 18세기 이전에는 사실상 과학 없는 기술의 시대였으며, 지금도 기술이 과학을 앞서곤 한다. 요즘 상한가를 치고 있는 딥러닝 기술은 신경세포의 신호 전달 모델을 모방하여 만든 퍼셉트론에서 출발했지만, 패턴 인식과 추론에 관한 뇌기능의 이해 없이 개척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여전히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른다. 어쨌든 딥러닝은 잘 작동한다.

기술이 과학을 압도하는 시대다. 로봇, 드론, 3D프린터, CRISPR, 머신러닝, 전기 자동차, 자율주행 자동차, 재활용 로켓, 클라우드 컴퓨팅, 양자 컴퓨터.. 현재 알고 있는 과학만으로도 새로운 기술은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멋진 기술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과학은 태연히 자연을 들여다보기만 한다. CERN의 LHC 가속기, 칠레의GMT 망원경, 슈퍼 카미오칸데 중성미자 검출기, LIGO 중력파 관측소, 인간 게놈 프로젝트처럼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거대 기술을 투입한다.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힘을 입자의 관점에서 기술하려는 시도는 더 많은 지지를 획득한다. 우주의 구성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이론적인 예측이 실험으로 나타날 때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는 듯한 희열마저 느껴진다. 그토록 ‘신의 입자’를 찾아 헤매지 않았던가. 얼마 안 있어 중력파를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이 맞았다. 일반 상대성이론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잘 들어맞는다. 인류는 새로운 중력파 안경을 갖게 되었고,전자기파로 관측할 수 없었던 우주가 모습을 드러낼 차례다.

힉스 입자와 중력파의 발견이 누군가에게는 큰 선물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어떤 소용이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힉스든 중력파든 먹고 살기 바쁜 시대에 웬 과학 같은 한가한 소리인가.

과학은 이야기를 만들고 생각을 바꾼다

스콧 샘슨의 <공룡 오디세이=""> 일부를 함께 읽어보자.

“문화사학자 토머스 베리는 우리가 지금 직면한 환경위기는 결국 이야기가 없는 탓에 생긴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현재 우리는 인류를 더 큰 맥락에 놓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의미나 커다란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많은 전산업사회의 문화(그리고 현재의 토착문화)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었던 자연에 대한 경외, 경이로움,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많은 과학자, 신학자,교육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베리의 답은 빅뱅에서 시작해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로 이어지는 위대한 이야기(Great Story)다. 때로는 ‘우주 이야기(Universal Story)’, ‘새로운 이야기(New Story)’, ‘진화의 서사시’라고도 불린다. …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는 과학혁명의 위대한 성취일 뿐 아니라 과학과 종교의 균열을 메우고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삶의 의미와 목적의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과학은 이야기를 만든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여러 종류의 신화를 현대의 관점에서 각색하려는 시도라고 보아도 좋다. 과학은 현대 인류가 총력을 기울여 함께 쓰는 대서사시다.

현대의 세계관이 새롭게 재구성되면 윤리장전도 다시 쓰인다. 특정 기술을 받아들일지 말지 증거를 수집하고 판단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과학의 역할이다. 예컨대 이산화탄소 배출이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 하는가, 담배가 폐암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가, 게임이 아이들을 폭력성을 부추기는가와 같은 질문이 던져질 때 과학적 근거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자연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는지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장기가 아니던가.

과학은 자연을 바꾸지는 않지만, 인류의 생각을 바꾼다. 하긴 우리 생각도 자연이라면 자연이다. 과학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새로운 윤리를 위한 공통의 기반이다. 과학은 기술의 혜택을 향유하는 사람들, 기술의 폭력에 피해 받는 사람들 모두가 발 디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확고불변한 지식은 없다는 것이 과학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우리는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논리보다는 증거에 의지해야 한다. 새로운 증거가 더해지면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첫날부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활용한 방식이고, 알파고가 바둑을 배우는 방식이며,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과학 지식은 계속 변하고 확장되는데 어제의 과학으로 이해했던 세계가 오늘의 과학으로 이해한 세계와 같을 수 없다. 과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요청한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발간하는 크로스로드 웹진에 실린 글입니다.